홍진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창고에서 ‘수해필림’이라고 적힌 필름 뭉치가 발견된다. 당시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 집단들을 찾아가 이 필름의 흔적을 따라가며 복원을 시도한다. 그런데 손상된 사진을 복원할수록 또 다른 삭제된 세계가 발견된다. 민주화운동의 주역들이 대통령을 비롯하여 기득권 세력이 된 후, 그들이 만드는 지옥을 막기 위해 싸웠던 수많은 노동자의 세계. 당시 엇갈린 국면이 다시 나타나는 가운데 지금, 여기의 풍경도 서서히 드러난다.
필름의 손상이 자연재해에 기인한다면 기억의 손상은 억압된 역사에 기인하기에 이 둘의 복원 작업은 질적으로 다르겠으나, 필름의 손상으로 인해 왜곡된 이미지가 사회적 기억을 환기하고 필름의 내용이 역사적 기억의 위상에 아이러니를 만든다. 수해를 입고 붙은 사진을 분리하기 위해 물에 넣으면 복원은커녕 이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더 녹아버릴 수도 있기에, 붙어버린 사진 그대로를 투명도만 높여서 스캔하는 방법도 제시된다. 1980년대 투쟁 현장을 찍던 이들의 인터뷰, 참세상 아카이브에 있는 2000년대 비정규직화 반대 투쟁 동영상, 작가가 촬영한 장면들은 훼손을 각오한 각각의 모습으로 도달한다. 그러나 이들은 마치 서로 붙은 채로 투명도가 높아진 사진처럼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되기도 한다. 엔딩크레딧의 카운트다운이 0을 가리키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생산된 위계, 그 실패한 시간의 기억이 종료되어 우리는 그 실패에 더 이상 잠길 수 없다. 영화의 종료를 향해 가는 카운트다운은 단호하게 우리를 시작의 시각으로 데려간다.
홍진훤HONG Jinhwon
한국 출생. 홍진훤은 영화와 사진을 통해 역사의 문제, 사회적 파편들을 기록하는 감독이자 시각 예술가이다.〈멜팅 아이스크림〉(2021)은 제14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아름다운 기러기상을 수상하며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