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일러 재생
수비나 슈레스타
Asian Premiere
1997년 네팔, 내전이 막 시작될 무렵. 열일곱 살 소녀 데비는 반군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과 성폭행을 당한다. 반군 지도자들이 그녀를 성폭행 피해자로 공개하면서, 데비는 수치스러운 낙인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우울증과 배제에 맞서 싸운 데비는 역설적으로 반군에 합류하여 전쟁이 끝난 후엔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데비〉는 관찰자적 시점으로, 과거의 고통을 딛고 일어선 데비가 다른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모아가는 현재의 여정을 담아낸다.
진정한 싸움은 모두가 승리를 이야기할 때 시작된다. 네팔 왕정에 맞서 싸운 게릴라 출신으로 국회의원의 자리까지 오른 데비 카드카의 투쟁이 바로 그렇다. 그녀는 내전이 끝나기 무섭게 화해와 용서를 논하는 네팔 사회 지도자들의 주장에 제동을 건다. 군주제가 종식되고 공화정이 들어섰을지언정, 내전 기간 여성들에게 자행된 잔혹한 폭력의 진실 규명과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전 당시 열일곱의 나이에 반란 혐의를 쓰고 구금되어 경찰과 군인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데비는 이 전쟁 폭력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유일한 생존자인 동시에 침묵 속에서 살아야 했던 수많은 생존자의 대변인이다. 〈데비〉의 연출자인 수비나 슈레스타 감독은 오랫동안 작성된 일기와 아카이브 자료를 통해 데비의 파란만장한 삶을 유려하게 재구성하는 동시에 현재의 데비가 마주하는 곤경을 밀착하여 담아낸다. 십대 소녀의 어머니로서 평온한 삶을 누릴 그녀의 마땅한 권리는 그녀를 ‘피해자’로만 낙인찍고, 역사의 치부를 들춰내는 소란꾼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의 질서 속에서 쉽게 행사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비와 생존 여성, 딸, 그리고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유대와 공감의 순간들은 두려움과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진정한 승리를 예감케 한다. 〈데비〉의 여정은 네팔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곳곳에서 여성과 약자를 대상으로 자행되는 위계적 폭력을 성찰하는 귀중한 지침이 될 것이다.
수비나 슈레스타Subina SHRESTHA
네팔 출생. 수비나 슈레스타는 서사의 확장을 시도하는 영화감독이자 기자이다. 슈레스타가 보도한 네팔 지진 관련 기사는 에미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며,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