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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2015)

I AM DOCU



베스터 보르크 수용소Respite

  • Germany/Netherlands/Korea
  • 2007
  • 40min
  • DCP
  • black and white

Synopsis

세계의 이미지와 하룬 파로키의 각인

영화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

2차 대전 이후 모더니즘의 정신은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로 촉진되었다. 영화의 근원적 속성들에 대한 성찰. 사유에 대한 사유. 누벨바그와 뉴 저먼 시네마를 아우르는 유럽의 ‘아트 시네마’, 시네마 베리테와 디렉트 시네마, 뉴 아메리칸 시네마, 이들을 중심으로 쓰인 모더니즘과 영화의 역사적 궤적을 관통했던 원동력이자 원심력은 영화에 대한 성찰이다. 명백하게 말하건데, 하룬 파로키는 이 궤적을 이끈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때이른 작고 이후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의 성과는 더욱 강하게 빛을 발한다. 아마도 오늘날 그의 비전이, 방법론이 그 어느때 보다 절실하기 때문일게다.

영화란 무엇인가?

모더니즘의 정점에서 사유의 중심이 되었던 ‘매체’라는 개념이 영화를 형식주의적인 태도에 가두었다면, 그 한계를 보여주고 극복의 단초들을 제안한 영화인이 파로키다. ‘영화’에 대한 성찰을 머나먼 지평으로 견인한 행동주의자. 그래야 할 필요성을 보여준 연구자이자, 이미지의 탐험가. 60년대 작가주의의 영향에 따라 작품의 ‘구성’이나 ‘형식’을 ‘분석’하고 ‘미장센’을 탐미하고 ‘작가론적’인 맥락에서 ‘메시지’를 파악하려 한다면, 우리는 이미 그가 이끈 영화의 진화로부터 도태된다. 그가 말하는‘영화’는 검은 방 속의 평면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며, 역사속의 방식이다. 질문의 방식이며, 방식의 질문이다. 영화란 무엇인가? “진공청소기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는 한 노동자가 아내에게 선물하기 위해 매일 부품 하나씩을 훔쳐왔다. 집에서 조립해 보니, 기관총이 되었다. 이 공장에서 기관총을 만든다는 정보를 입수한 한 운동권 학생이 노동자로 위장, 회사에 잠입하여 결정적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매일 부품 하나씩을 훔쳐왔다. 집에서 조립해보니, 진공청소기가 되었다.” 초기작인 <꺼지지 않는 불(Nicht löschbares Feuer)>(1969)에서 묘사되는 상황은 오락거리 혹은 예술매체로서의 영화가 가진 태생적 정체성이 제국주의의 군사적 열망과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산업화된 이미지의 제작과 유통 체계에서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폭력적’인지,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무기’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의미 하다. 둘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같은것인 게다. 형식적 맥락에서 본다면, 그의 초기작들은 ‘저항 영화’가 아니다. 젊은 파로키에 있어서 ‘영화’를 도구로 삼는 순혈주의적 ‘저항’은 모순일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도구로 삼아 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체제를 비판하고 역사 속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것은 제국주의의 논리를 재생산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영상은 역사의 궤적 속에서 권력과, 폭력과 결탁해왔다. 사진과 영화의 감각과 논리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도구로써 꾸준히 활용되어 왔다. 이번에 DMZ영화제에서 소개되는 두 편의 영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Bilder der Welt und Inschrift des Krieges)>(1988)과 <베스터보르크 수용소(Respite)>(2007)는 이러한 그의 관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두 작품에서 파로키는 저항의 새로운 ‘영상언어’를 개발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위치에서, 폭력적 주체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들의 관점에 관객의 위치를 동일시시킨다. 폭력의 논리를 재전유 한다. 2차 대전 중에 나치가, 그리고 미국정부가 유태인 수용소를 기록한 행위는 그 어떤 오락영화보다 영상의 기능과 작동 방식에 대한 결정적 단서가 된다. 카메라라는 장치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이를 ‘이미지’로 만들고 유통, 전람하는 방식에 총체적으로 폭력의 역사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폭력과 전쟁은 영화의 유전자다. 곧 삶의 일부다. 전쟁은 이미지에, 역사에 ‘새겨져(inscribed)’있다. <베스터보르크 수용소>는1944년 네덜란드 베스테르보크(Westerbork)에 세워진 유태인 수용소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들을 그대로 재활용한다. (슬라이드 쇼처럼 기본적인 정보만을 전달하는 간자막은 형식적 혁신을 철저하게 자제한다.)기록 영상은 우리가 상상하던 수용소의 현실과는 대조되는 평안한 일상부터 담고 있다. 흥겨운 음악회가 열리고 마당에선 여성들이 율동을 한다. 우리는 의뭉스런 시선으로써 비극적 역사의 단상들을 지켜보는 동안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는 누구의 시선인가? 어떤 관점인가? 자막들에 따르면, 이 ‘영화 속 영화’를 촬영한 기사는 루돌프 브레스라우어 (Rudolf BRESLAUER)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던 유태인이며, 결국 죽음을 당한 희생자다. 하지만 이미지는 단지‘ 피해자’의 관점만을 담지 않는다. 파로키는 이 이미지들이 나치친위대 장교 알버트 게메허(Albert GEMMEKER)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밝힌다. 영화를 성립시킨, 오늘날 우리의 ‘목격’을 가능케 하는 태생적 근원은 가해자의 의도인 것이다. 이미지의 관점은 궁극적으로 가해자의 것인 게다. ‘영화’를 성립시키는 논리라는 것은, 가해와 피해, 폭력과 무고함의 이분법적 양립을 와해시키는 과격한 것이다. 그것이 ‘영화’의 ‘폭력’이다. 모든 영화의 태생이자 필연. 우리는 이 폭력적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불편함을 떠안아야 한다. 불편한 동일시는 계속해서 말없이 우리를 끌어들인다. ‘역사’속으로. 영화의 딜레마 속으로. 관람객으로서 우리가 맞아야 하는 모순적 운명 속으로. 파로키는 기록에 남은 작은 디테일들로써 그 기록 자체의 정황적 맥락들을 추리한다. 그 추리의 과정에 우리를 동참시킨다. 아우슈비츠를 행해 출발하는 기차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손을 흔든다. 여행 가방에 적힌 작은 글씨는 날짜를 알린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결국 집요한 관찰이 유도하는 바는 지식의 완성이 아니라 철저한 부조리다. 놀랍게도 기차가 떠나는 장면은 상호 텍스트적인 연결점을 생성한다. 역시 홀로코스트를 다뤘던 알랭 레네(Alain RESNAIS)의 <밤과 안개 (Nuit et brouillard)>(1955) 에서도 나타났었던 유태인 소녀가 닫히는 기차 문 사이에 가까스로 얼굴을 드러낸다. 레네의 장면에서 몰랐던 새로운 정황이 있다면, 이 ‘피해자’의 이미지 역시 ‘연출’되었으리라는 것. 영화는 우리의 시선과 지식을 교란하는 폭력이다. 우리가 역사의 기록을 통해 지식을 축적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악마적 교만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서 파로키는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독일 산업 시설들의 이미지를 불러온다. 그것은 폭격의 임무와 더불어 목표지점들을 촬영하라는 임무를 맡은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긴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에 파로키는 이미지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속성을 행동으로써 가한다. 분석과 측정이다. 사진의 기원적 의미는 세상을 재현하는 하나의 고정된 관점을 설정함에 있다. 파로키는 이것이 곧 오늘날 전쟁의 논리임을 제안한다. 르네상스의 투시법으로부터 경찰의 몽타주 합성술, 항공 시뮬레이션과 화장술에 이르기까지, 이미지의 정치학은 관찰의 대상에 대한 분석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사진과 영화의 ‘매체적’속성은 이로부터 절대 자유롭지 않다. 놀랍게도 항공 이미지들에 우연히 포착된 것은 유태인 수용소다. 이것은 촬영을했던 폭격기 조종사도, 당시에 사진을 다루었던 분석가도 간과했던 사실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시선과 지식이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의미를 달리한다. “우리는 언어를 경계하듯 이미지를 경계해야 한다. 이미지와 언어는 담론, 즉 의미들의 망으로서 직조된다. 내가 할 일은 이미지를 정체시키고 있는 파편들을 치우고 은폐된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파로키는 제국주의의 맥락에서 성립되었던 ‘사진적 태도’를 그대로 재전유(détournement)한다. 폭력의 맥락에서 촬영된 이미지들에 분석과 측정을 가한다. 이미지를 확대하고 디테일을 세밀하게 응시한다. 폭력의 논리로써 폭력을 바라보기. 어쩌면 폭력적 권력에 대한 순수한 의미로서의 전복이란 불가능하다. 전존적인 시스템의 내부에서 시스템으로부터 단절되고 독립된 진공 상태를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KRAUSS)가 말 한대로 ‘재전유’는 자본주의의 막강한 권력 속에서 유일하게 남은 저항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1960년대부터 파로키는 그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파로키의 작품연보가 축적되어온 지난 40년 간, ‘영화’라는 장치는 무궁한 변화를 겪어 왔다. 캠코더와 폐쇄회로 카메라, 컴퓨터 그래픽과 가상현실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궤적은 필름과 카메라 등의 물질적인 기반을 훌쩍 초과해 버린지 오래다. 현실을 재현하고 이미지를 유통하는 기술과 방식은 무궁무진하게 다층화 되었다. 일상의 작은 구석으로부터 역사의 거대한 ‘획’들 속에, 혁명과 전쟁의 현장에, 삶의 모든 방식과 생각 속에, 영화는 전존한다. 늘 작동하고 있다. ‘장치’로서. ‘기술’뿐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관계 맺는 방식, 개인과 제도가 관계 맺는 방식, 개인과 영화가 관계를 맺는 방식이 바뀌었다.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이 바뀌고 역사자체가 바뀌었다. 사유하는 방식이 바뀌었고, 그 사유를 소통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이미지’가, ‘현실’이 달라졌다. 달라지고 있다. 이 역동적인 변화 속에서 여전히 이미지의 ‘미학’을 고집하는 형식주의와 작가주의의 거대한 무덤으로부터 자유로운 작가는 절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파로키의 ‘영화’는 더욱 중요하다. 사유이자 노동. 역사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자, 역사를 만드는 도구. “[미국이 베트남에서 무기로 사용한]고엽제를 어떻게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고엽제에 의한 신체손상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엽제 화상 사진을 보여준다면, 당신은 눈을 감을 것이다. 먼저 사진에 대해 눈을 감을 것이고, 기억에 대해 눈을 감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에 대해 눈을 감을 것이고 전체 맥락에 대해 눈을 감을 것이다.”(<꺼지지 않는 불>중) 그는 이미지의 딜레마에 대해 어떤 행동을 남겼는가? 즉, 영화란 무엇인가? 그의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우리는 질문들을 역사화하는 방식들을, 유효성을 창출하는 방식들을, 그로부터 배웠다. (서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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